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프 전쟁 (문단 편집) ===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 전쟁 후 이라크는 모든 무역을 미국에게 통제 받는 경제 봉쇄를 당하고, 1500억 달러라는 거액의 전쟁 배상금까지 강제로 물게 되었다.[* 당연히 이 배상금 지불한다고 국민에게 돈을 뜯어내다 보니 이라크 국민의 삶이 어려워진데다 이라크 내에서 후세인에 대한 경멸, 증오가 커졌다.] 특히 이라크가 조금이라도 미국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나 [[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해 대놓고 반미를 표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할 때까지 반미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라크는 그때 망가진 군대를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 년 후 [[이라크 전쟁|다시 벌어진 전쟁]]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단지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줄었음에도 정작 병력손실은 절반 이하에 전투에서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 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과 소련, 중국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 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후세인은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 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얼마 후 지원은 다시 재개된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 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 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의 가장 큰 적은 반전 여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에 반대하는 언론사에서 대놓고 반전 여론을 조성하는 기사를 썼고, 북베트남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미국 정부를 곤란에 빠트린 적이 있었기에 걸프전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역사의 오점이라고 하지만, 그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얻은 교훈으로 미국은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이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은 셈이기 때문. 사실 미군 자신조차도 이 전쟁은 소모전이 될 거라고 예상했고, 1990년대에도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미군은 [[걸프전]]은 언제까지나 예외라고 봐서 북핵 파동 당시인 1994년에도 여전히 80년대식 소모전 개념으로 접근했다. 1994년 북핵위기가 절정에 달했을때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 대신 지미 카터의 방북을 통한 협상으로 기울어진 것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북한을 붕괴시키기까지 전쟁은 최소 3개월 정도 걸리고 한국은 군인 49만, 민간인 포함 100만명이 사상하고, 미군은 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워게임]] 결과 때문이었다. 이런 개념이 완전히 바뀐 것은 2003년 이라크침공 이후이다.[* 사실 2010년대인 현재도 미군이라고 해서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가진 국가에 한해 그렇다는 것이지, 가능성은 없겠지만 [[러시아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 같은 강대국과의 전면전에서는 소모전의 교리를 따르도록 되어 있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군 역시 입장이 개선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가 조금만 나오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은 이 때문에 [[민간군사기업|PMC]]와 계약하고,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통제]]와 [[상명하복]]이니 [[노먼 슈워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출구전략은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노련한 테크닉과 결단력으로 [[부시]] 미 대통령은 걸프 사태 기간 중 다국적군이 내포하고 있던 다양한 이해 관계와 어려움 등을 헤쳐나갔다.부시 대통령은 정치와 전쟁 수행의 균형을 잘 유지했다.베트남전 때의 상황과는 달리 그는 야전 사령관들의 손을 「등뒤로 묶지 않고」 많은 자율권을 부여했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부시 대통령의 이런 판단이 옳았다는게 판명됐다.이번 전쟁으로 해방된 것은 [[쿠웨이트]]뿐만이 아니다. 미국인들도 베트남 망령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소련]]과의 민감한 관계에서도 노련함을 과시했다.그는 걸프 지역에서의 안정과 평화는 소련과의 적대 관계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냉정한 사리 판단에 의거, 소련을 상대했다.지상전 개시직전의 숨막히는 국면에서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으로 하여금 [[후세인]] 카드를 활용하게 배려해 [[모스크바]]와의 관계 악화를 방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